🕯 83년 “2천 원 들고 다시 거리로”…첫 직장 잠실 장미아파트 ‘야래향’ 탈출 후, 나는 어디로 가야 했나? [시리즈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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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6개가 내 침대였다”…잠실 장미아파트 ‘중국음식점’에서의 첫 직장 생존기 [시리
🔥“의자 6개가 내 침대였다”… 잠실 장미아파트 ‘중국음식점’에서의 첫 직장 생존기 [시리즈 9] 안녕하세요?날마다 설거지 하는 남자새벽빛입니다.^^* https://blog6906.tistory.com/91 “잠실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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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이야기합니다.
🌧 자유인가, 추락인가?
첫직장 잠실 장미아파트 상가 내 중국음식점, '야래향' 식당을 나올 땐 그저 모든 걸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퇴근일지도 모를 순간, 내게는 첫 탈출이었다.

주머니 속엔 계란 심부름값 2천 원이 전부.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누구 하나 기대할 곳도 없었다. 집에 다시 들어가는 건 아예 상상조차 안 했다. 새엄마의 구박, 잔소리가 싫어 집에서 나온 건데, 거길 또 다시 들어가라고? 안될 일이었다.
비는 내리고 있었고, 나는 아무 목적지 없이 잠실사거리에서 지금의 강남면허시험장(83년 당시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탄천길 방향으로 다시 또 걷기 시작했다. 두번째로 느낀 자유는 너무 조용했다. 아직도 미성년자였던 나에게 그땐 모든 것이 차갑고, 무서웠다. 그래도 견뎌야 했고, 헤쳐나가야만 했다.
https://youtu.be/4_qY2jDQ6YQ?si=9RBEoNmUrFcfvqF5
🎵 거리에서 다시 들린 김수희 노래
다시 길을 걷던 중, 리어카 카세트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음악 소리, 또다시 김수희의 노래였다.
그 노래 가사 하나하나가 어딘가로 버려진 느낌의 나를 감싸 안아 주는 듯했다.
음악은 신기했다. 말로 하지 못하는 내 마음을 대신 토해주는 존재 같았다. 그리고 말해줬다. “너, 지금 슬퍼도 괜찮아.”
💔 길 위의 시간, 그리고 처음 느낀 ‘세상과의 거리’
길 위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사람들의 시선에 점점 더 투명한 존재가 되어갔다. 지나가는 같은 또래 중학생, 고등학생 무리들, 출근하는 회사원들, 커플들… 저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무표정인 사람들도 나에겐 그저 행복해 보였다. 난 저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들 모두와 나 사이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한때는 나도 그들 중 하나였을까? 아니면, 애초에 나는 그들 틈에 껴본 적도 없었을까? 나는 존재하지만,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집 앞에서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에서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아이들 얼굴만 봐도 모두가 부러워 보였고, 딴 세상 사람들 같았다.
⏳ 지금 돌아보면…
이 글을 쓰는 지금, 그 시절의 나에게 묻고 싶다. “어떻게 버텼니?” 그리고 대답해주고 싶다. “그래도 너는 포기하지 않았구나.” 누구 하나 손 내밀어주지 않는 거리에서, 단돈 2천 원으로 살아남으려 애쓰던 너는 진짜 강한 아이였다.
수중에 갖고 있는 돈은 단돈 2,000원, 그걸 들고 돌아다녔다. 쓰지도 않았다. 그저 걷기만 했다. 가방은 없었지만, 치약과 칫솔은 있었다. 당시 사용했던 치약이 뚜렷하게 기억나는데, 튜브를 짜면 투명한 녹색 치약이 나오는 클로즈업이라는 브랜드가 있었다. 닦고 나면 입안이 상쾌해서 그것만 사용했었다.

네이버 검색창 검색해 보니 지금도 있는 것이 신기하다. 이런 세세한 것까지 기억 나다니, 내가 생각해도 그러고보면 난 참, 한 기억 하는가 보다.
잠실사거리에서 지금의 잠실운동장(당시엔 잠실운동장이 없었다)에서 성남으로 이어진 탄천길 걷다 보니 탄천길 바로 옆에 위치한 중앙일보 신문보급소가 보였다.
지금도 신문배달이 남아있지만, 당시만 해도 중국음식, 신문배달은 거의 국민알바 수준이었다. 그만큼 할 거 없을 때 만만하게 바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중국음식, 신문배달이었다.
'그래, 이번엔 신문배달 해 보자, 근데 과연 잠잘 곳을 마련해 줄까?' 그게 걱정스러웠다.
건강한 신체조건으로 몸으로 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었는데, 먹는 거 잠자는 거 없는 것이 늘 문제였다.

당시 잠실 신천동 근처에는 엘리베이터 없는 5층짜리 대단지 잠실 시영아파트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이야 뭐 다들 몰라볼 만큼 재건축되어 고층아파트들로 즐비해졌지만 당시 신천동은 거의 허허벌판이었다.
하염없이 걷다가 잠실 탄천길(지금의 잠실 신천동 끝자락쯤 될 것이다) 우연히 발견한 중앙일보 신문보급소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과연 두 번째 직장, 취업을 할 수 있었을까?

다음 이야기에서 이어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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