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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배달이라도 해야겠다”…2천 원 쥐고 찾아간 중앙일보 보급소, 그리고 또 다른 시작 [시리즈 11]

안녕하세요?
새벽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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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년 “2천 원 들고 다시 거리로”…첫직장 잠실 장미아파트 ‘야래향’ 탈출 [시리즈 10]
🕯 83년 “2천 원 들고 다시 거리로”…첫 직장 잠실 장미아파트 ‘야래향’ 탈출 후, 나는 어디로 가야 했나? [시리즈 10] 안녕하세요?새벽빛입니다.^^* https://blog6906.tistory.com/101 🔥“의자 6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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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이야기합니다.
🚪 “실례합니다, 신문배달 자리 있나요?”
지금의 강남면허시험장 건너편 신천동 탄천길에 위치한 중앙일보 보급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그 특유의 잉크 냄새가 먼저 날 반겼다.
내 또래로 보이는 형들이 바쁘게 신문을 접고 있었고, 안쪽 사무실에서는 중년 남자 한 분이 담배를 물고 앉아 있었다. 머뭇거리며 다가가 말했다.

“저… 혹시 신문배달 할 수 있을까요?”
그 사무실 안 남자, 그러니까 그 보급소장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담배를 탁 털며 말했다.
“학생? 몇 살이야?”
“중학교 2학년인데요, 휴학계 내서 안 다녀요… 열다섯 살이에요.”
“… 집은?”
이젠 눈치가 조금 생겨 집 얘기는 하기 싫었다. 새엄마 어쩌고 대답하면 보나 마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공세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예 집이 없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없어요.”
그 말에 순간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그 짧은 대화로 내 사정을 다 알아챈 듯했다. 보급소장은 한숨을 길게 쉬더니 이렇게 말했다.
“방은 없어. 여기서 신문배달 하려면 잠은… 저기 뒤 짐 쌓아둔 창고에서 자야 하는데, 그래도 하겠다면 해.”
내겐 선택권이 없었다.
“할게요.”
🌙 창고에서의 두 번째 ‘의자침대’
보급소 뒤편, 비닐 덮인 신문 더미 사이, 겨우 사람 한 명 누울 공간이 있었다. 지붕은 비가 새고, 새벽이면 한기가 올라왔다. 그럼에도 그곳은 중국음식점 의자 6개 침대보단 훨씬 나아 보였다. 적어도 저녁마다 각목으로 맞지는 않았으니까.
첫날부터 신문배달은 혹독했다. 새벽 3시쯤 일어나 갓 도착한 트럭이 신문더미를 도로가에 내려놓으면 보급소 안으로 함께 날랐다. 그리고 신문더미를 일일이 풀어 신문 사이사이에 광고전단(찌라시) 넣는 작업을 해야 했다.
그렇게 30여 분간 작업을 마친 후 내가 할당받은 신문들을 자전거에 싣고 곧바로 어두운 탄천길을 가로질러 잠실 시영아파트로 향한다. 눈 오는 날, 비 오는 날도 예외는 없었다.
그러나 난 달렸다. 왜냐면 '난 살아야 했으니까' 그리고 이 일이 끝나면 겨우 몇 천 원이라도 손에 쥘 수 있었으니까.
다행히도 보급소에서 기존 배달하던 형이 남은 싸이클 자전거 1대를 나에게 외상(월급날 주기로 하고)으로 팔아 싸이클 자전거로 배달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싸이클 자전거가 집으로 다시 들어가게 할 줄은 몰랐다.
🍙 컵라면 하나에도 벅차던 시절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면 오전 7시. 모두들 해장국을 먹으며 아침을 해결했지만, 난 그마저 사 먹을 돈이 없었다. 보급소 옆 구멍가게에서 150원짜리 컵라면 하나 사서 뜨거운 물 부어 먹는 게 전부였다.
뜨거운 국물 한 모금 넘길 때마다 눈물이 났다. 슬퍼서가 아니라, 배가 고팠고, 날마다 공포에 떨며 두들겨 맞지 않아도 되는 게 너무 고마워서였다.
💭 “다시는 이 자리에 돌아오지 않겠다”
신문배달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동안 나는 다짐했다.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엄마 찾으러 가야겠다’
‘엄마를 찾아서 엄마와 함께 살아야겠다. 엄마를 만나면 다시 학교 갈 수 있겠지’
물론 그땐 방법도 몰랐고, 아무런 대책도 없고 막연했지만 다만 그 마음 하나만은 분명했다.
✍️ 지금, 그때를 돌아보며…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 나는 참 많은 것을 배웠다. 가출, 가난, 추위, 고독, 배고픔… 그 모든 것이 나를 깎아내리지 않고 오히려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시간이었다.
남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컵라면 하나, 버려진 신문 더미 위 창고, 비 오는 날 젖은 운동화…
그 모든 것이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이 점점 생생해지고, 나를 지탱해 주는 뿌리처럼 살아 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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