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6개가 내 침대였다”… 잠실 장미아파트 ‘중국음식점’에서의 첫 직장 생존기 [시리즈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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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 장미아파트 상가내 ‘야래향’에서 보낸 가출소년의 6개월 – 그날 파출소에서 벌어진
“잠실 장미아파트 상가내 ‘야래향’에서 보낸 가출소년의 6개월 – 그날 파출소에서 벌어진 일” [시리즈 8] 안녕하세요?날마다 설거지 하는 남자새벽빛입니다.^^* “자전거 배달하다 사고 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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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이야기합니다.
☠️ 첫 사회생활, 그곳 역시 전쟁터였다.
그렇게 내 인생 첫 직장은 잠실 장미아파트 상가에 있던 중국음식점 ‘야래향’이었다. 나의 10대 중반, 그곳이 내 사회 첫발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시작은 지옥의 문을 여는 일이었다. “형”이라고 불러야 했던 종업원들의 위계질서는 마치 감옥 같았다.

배달이 조금이라도 늦거나 눈에 거슬리면 욕설과 폭력이 날아왔다. 주방, 홀 바닥을 닦다가 걸핏하면 밀쳐지고, 컵을 하나 잘못 놓았다고 뺨도 맞았다. 저녁엔 기합에 각목으로 늘 맞아야만 했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고, 그렇게 난 말없이 그 안에서 조금씩 부서져 갔다.
🛏️ 의자 여섯 개가 나의 침대
식당에는 종업원 숙소가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위 종업원 사람들’의 공간이었다. 나 같은 막내는 감히 그 방 안에 발도 들이지 못했다.
밤 11시 영업이 끝나면, 손님이 떠난 홀에 남겨진 의자 여섯 개를 이어 붙였다. 그 의자들 위가 내 잠자리였다. 허리를 펴면 삐걱거렸고, 가끔 쥐가 지나갔다. 그래도 잠자는 그 시간만큼은 편했지만, 내일이 항상 두려웠다.

'내일은 또 어떤 이유로 맞아야 할까?'
그게 두려워 집을 나왔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가 되어 가고 있었으니 다시 탈출을 꿈꿔야 했다. 냄새 밴 작업복을 이불 삼아 덮고, 내일은 조금 나아지기를 바라며 잠이 들었다.
🙊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주인 아저씨가 계실 땐 그나마 종업원들은 점잖았고 한없이 좋은 형들이었다. 그래서 더 말할 수 없었다. “저 형들이 저를 괴롭혀요”라고 고자질하면 그날 밤, 나는 더 잔혹한 보복을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아예 고자질조차 꿈꾸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엄마 없이 나 혼자 감당하는 것이 늘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수 없었다. 그저 매일같이 “참자, 참자, 이번 주만 더 참자”를 되뇌었다.

👕 6개월째 입고 있는 츄리닝 옷 한 벌, 월급 3만 원
6개월 동안 옷 한 벌도 못 샀다. 주인아저씨는 “월급은 적금으로 넣어두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통장을 본 적이 없었다. 종업원 형들의 폭력이 날로 심해질 때쯤 도망 나오다시피 퇴사할 때 수중에 남은 단 돈 2천 원.
“계란 한 판 사와라”던 심부름 계란값이었다. 그 2천 원을 손에 쥐고, 무작정 식당을 나왔다. 그날따라 유난히 길거리에 비가 내렸다.
https://youtu.be/4_qY2jDQ6YQ?si=9RBEoNmUrFcfvqF5
🎵 나를 울린 노래, 김수희의 ‘멍에’와 ‘못 잊겠어요’
그날, 지나가는 리어카 라디오에서 들려온 노래가 있었다. 김수희의 ‘멍에’와 ‘못 잊겠어요’.
“사랑의 상처를 남기네, 이제는 헤어졌는데…”
“지금도 생각난다, 자꾸만 생각난다…”
https://youtu.be/Za5L3qgogyY?si=Q983HIQvyMxOTVNG
마치 내가 처한 상황을 그대로 읽은 듯한 가사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노래한 줄, 한 줄이 그 지옥 같던 ‘야래향’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이별은 사람 사이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그때, 한 공간, 한 시간을 이별하고 있었다.
💔 지금 돌아보면…
그곳에서의 6개월도 미성년자였던 나에겐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기간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 가장 혹독하게 나를 단련시킨 시기이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 차 안 라디오에서 '멍에'가 흘러나오면 그 식당, 도망 나와 방황했던 잠실거리, 그때의 상황들이 떠오른다.
어찌 그 시절을 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미련은 없다. 그때의 내가 있었기에 그때부터 지금까지 난 어떤 상황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으로 서 있다.
밑바닥을 빡빡 기어 본 사람은 그 어떤 것을 겪어도 밑바닥보다 덜 힘들 테니 뭐든지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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